츄다자/전력60분

[츄다자] 전력 60분 - 우산

라덕 2021. 11. 6. 21:06

*2020년 9월 27일 참여했던 글의 백업입니다. 옮기며 문장 수정이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가끔 한 번씩 뻔한 핑계가 필요해질 때가 있다.
낮에 빠진 강에 현관 열쇠를 흘려 잃어버렸다던가, 일이 늦게 끝나서 돌아가는 차편이 마땅치 않았다던가.
그리고 오늘은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아주 뻔한 이유였다.
물에 닿으면 녹는 설탕 인형도 아니고 이 정도 비쯤이야 맞으면서 돌아가도 상관은 없었지만, 하나뿐인 코트가 비에 젖는 것은 역시 싫었다. 아무리 외모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해도 아침부터 덜 마른 코트를 입고 출근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뭐, 이런 것도 우산을 새로 산다면 해결이 될 문제였지만 다자이 본인이 굳이 새 우산을 사야 할 필요와 이유 또한 느끼지 못했다는 게 정답일 것이다.
초인종을 누를 생각도 않고 망설임 없이 도어락을 만져 제집인 양 안으로 들어셔면, 예상과는 달리 집안은 빛 하나 없이 조용히 어둠에 잠겨있었다.
어라, 아직 귀가전인가? 오늘은 분명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관에 츄야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방안의 에어컨도 공기청정기도 작동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맞을텐데 이상할 정도로 인기척이 없었다. 쾌적하고 적당히 포근한 공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다자이는 머리와 코트에 작게 붙은 빗방울을 손가락으로 대충 훌훌 털어냈다.


“츄야~ 나왔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면서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집안에 성큼 들어서도 여기가 어디라고 왔냐라던가 비는 왜 맞고 기어오냐는 불만이 날아오기는커녕 여전히 집안은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다.
가라앉아 있는 공기에 괜히 살금살금 걸음을 떼며 침실의 문을 열면, 아니나 다를까 찾던 인물이 침대 위에 무방비로 잠들어 있었다. 최소한으로 낮춰진 방안의 조명과 잠에 빠진 규칙적인 숨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가득했다.
웬일로 태평하게 쿨쿨 자고 있담.
다자이가 침대 옆으로 가서 목 끝까지 덮인 이불을 들쳤을 때에서야 찾고 있던 집주인, 나카하라 츄야는 반쯤 감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다자이를 올려다 봤다.


“……뭐야.”


“뭐야, 가 아니잖아. 이상한 놈이 들어왔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세상모르게 자고 있어?”


“어차피 이 집에 들어오는 이상한 놈은 네놈밖에 없어.”


얼씨구다.
츄야는 다자이의 어이없어하는 눈초리를 무시하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다자이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츄야를 다자이가 이불째로 뒤에서 꽉 끌어안는다.


“뭐야~ 나 무시하지 마.”


“잠 좀 자자…일 때문에 집 침대에 3일 만에 누운거라고….”


“제대로 된 잠은 3일 만 이지만, 날 본건 2주 만이잖아?”


“뭘 비교하는거야, 네놈은….”


낮게 잠긴채 어이없이 웃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마자, 다자이는 순간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따끈한 몸을 자신 쪽으로 돌려 그 얼굴에 마구마구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오늘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그 대신, 츄야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다자이의 볼을 간지럽혔다.
모든 것에 욕구가 크게 없는 다자이이지만 이래 봬도 가끔 한 번씩, 츄야의 그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마구잡이로 키스가 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생기기도 한다. 이건 물론 츄야한테 말한적도, 말 할 생각도 없는 다자이 속에서만 일어나는 충동이지만.
츄야의 몸에서 최근 새로 산 바디워시 향이 은은하게 풍겨온다. 둘이서 같이 쇼핑하러 갔을 때 드물게 둘 다 마음에 들어하면서 사 왔던 것이었다. 달콤한 냄새가 츄야의 체향과 섞여 묘하게 더 단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츄야는 다자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이 이불 안에 있던 팔을 빼,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다자이의 머리통을 툭툭 성의 없이 쓰다듬었다. 어쩐지 다 괜찮다고 말하듯이.


“…츄야, 나 뽀뽀해도 돼?”


“그러던가.”


“어- 정말? 해도 돼?”


“정말.”


“나중에 무르기 없기야?”


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평소보다 엄청나게 순순하다.
다자이는 조심스레 츄야의 자다 깨서 부어오른 눈꺼풀에 한번, 관자놀이에 한번, 그 다음은 콧등에, 그리고 볼에 차례차례 입술을 꾹꾹 눌렀다. 그러면 츄야가 다시 느릿하게 감은 눈을 뜨고 다자이를 바라봐온다. 잠기운과 미약한 성욕과 여러 가지 감정이 이것저것 섞인 탁한 색의 눈빛으로.


“네놈이 제일 하고 싶은 건 거기가 아닐텐데.”


그 순간, 다자이는 그 말을 내뱉는 입술에 바로 달려들고 싶었지만, 충동을 행동에 옮기는 대신 츄야의 눈을 진지하게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섹스할래?”


과연 자신의 눈에는 지금 무슨 감정이 일렁이고 있을까.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면 츄야는 작게 코웃음을 치고는 다시 다자이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이렇게 매정하게 등을 보이다니. 오늘 밤만 두 번째다.
그러면 다자이가 또 츄야 등 뒤에 달라붙어 다시 징징 거렸다. 누가 보면 반복되는 이 상황이 삼류 시트콤 같다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다자이는 진지했다.


“뭐야아. 등 돌리지마~ 무시하지 마~ 섹스 하자니까~?”


“아~~~ 헛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


“섹스 하자고?”


“헛소리 하지 말랬지.”


어이없다는 듯한 한숨 같은 숨이 흘러나온다. 츄야는 몸을 다시 돌려 다자이를 마주 꽉 끌어안아 왔다. 그리고는 둘러진 손이 이내 어린애를 다루듯 토닥토닥 규칙적인 리듬으로 등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귓가에 닿아오는 츄야의 숨소리가 편안한걸 보니 정말 이대로 잠들어버릴 모양이다. 결국 수면욕이 성욕을 이겨버린 것인가.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잠잘 준비도 전혀 되지 않은 상태지만, 팔 안에 있는 따끈한 몸과 숨소리, 등에 닿는 손길에 잡아 끌려가듯 덩달아 잠에 빠질 것 같았다. 평소에는 잠이 오려면 한참을 고생하는데. 이럴때만 불현 듯 잠이 찾아오는 게 조금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뽀뽀 더 하고 싶었는데. 피어오르다가 꺼져버린 다른 욕망의 억울함도 고개를 들어서, 코앞의 입술에 쪽 뽀뽀를 하면, 만족스럽다는 듯이 츄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얄미워.


“아, 나, 잠깐만. 코트―.”


겨우겨우 몸을 비틀면서 코트를 벗으면, 이리저리 쓸려 구깃해진 코트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분명 츄야가 내일 아침에 보면 뭐라고 할 테지만 끌어얀겨 있는 다자이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밖의 비바람은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 지금 둘이 함께 있는 이 방안에는 빗방울 하나 바람 하나 들어올 수 없다.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완벽하게 둘만의 공간이라는 그 사실 자체가 다자이를 굉장히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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츄다자 전력 60분 / 주제 : 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