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다자/단편 14

[츄다자] 술버릇

“사랑해.” 난데없이 들리는 나른한 한마디에 고개를 돌리면, 거기엔 터질 듯 발갛게 물든 얼굴을 한 츄야가 있었다. 음―. 다자이는 별다른 대꾸 없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츄야를 상대하는 것보다 안주로 나온 카나페에 집중하는 쪽이 백배 천배는 유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누군가는 이걸 보고 사랑 고백이 단칼에 거절당했다거나 나를 너무하다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오해라고 말하고 싶었다.지금 여기는 분위기 좋고 술이 맛있는 지하의 단골 술집이고, 츄야는 오늘 마시던 술이 지나치게 맛있었던 나머지 평소의 주량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즉, 저건 술주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얘기다.정작 츄야는 다자이에게 무시당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 모양인지, 다자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피실피실 웃더니, 이내 바..

츄다자/단편 2019.08.11

[츄다자] 거품

“여름엔 역시 바다지.” 바다? 그건 언제든, 여름이 아니라도 사시사철 볼 수 있잖아. 요코하마는 항구도시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거야? 츄야는 이제 자기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까먹을 정도로 머리가 나빠진 걸까. 다자이가 그렇게 말하면 일상의 바다와 휴양지의 바다는 다른게 당연하지 않냐는 것이 츄야의 주장이었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비행기를 타고 먼 타국으로 갈 수는 없어도 요코하마가 아닌 바다를 보고 싶다고. 에엥~ 바다가 거기서 거기지. 츄야는 잊고 있는 것 같지만, 바다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구?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바다를 보든, 그 바다를 보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보고 싶다면 혼자 가면 되는게 아닐까? 왜 나까지? 으응? 응~? 다자이가 열심히 그런 주장..

츄다자/단편 2019.08.11

[츄다자] 오늘, 같이.

* 12월 23일에 열렸던 츄다자 교류회에 오셨던 분들께 드렸던 원고예요. * 크리스마스 주제로 썼었기 때문에 날짜에 맞춰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공개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어디선가 크리스마스 캐럴의 멜로디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짤랑짤랑 탬버린 소리와 템포가 빠른, 몸을 들썩이게 하는 리듬. 집중력이 확실히 흐트러지긴 한 모양이다. 다자이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뻑뻑해진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매년 이맘때면 어디를 가든 흘러나오는 노래라서 그런지 이상하게 캐럴만 들으면 한해의 끝이 불쑥 곁으로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앞으로 며칠이나 남았더라. 감흥 없이 휴대전화의 폴더를 열어 화면을 보면 12월 25일이라는 날짜가 뚜렷하게 찍혀있었다. 깜박.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가 ..

츄다자/단편 2018.12.25

[츄다자] 언젠가의 그 새벽에.

*마폴님께 선물로 드렸던 글이에요:>*열다섯이나 열여섯쯤으로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합니다...! “추워.” “굳이 여기까지 오겠다고 한 건 네놈이었잖아.” “그래도 추운 건 추운 거야.” 하아. 숨을 내뱉으면 옅은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진다. 그것에 괜히 더 추워지는 기분이라 다자이는 어깨에 걸친 코트를 몸 안쪽으로 여몄다. 아직 추위가 오긴 이른 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해가 뜨기 전의 새벽 자체를 얕본 모양이다.다자이는 주저앉아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고는 하늘로 시선을 보냈다. 츄야도 옆에 선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먼지 같은 별들이 드문드문 희미하게 보이는 새까만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날이 밝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동이 트려면 멀었다. ‘갑자기 보고 싶은 게 생..

츄다자/단편 2018.11.08

[츄다자/조각글] 같이 술을 마시던 어느 날.

*트위터 쪽 조각글 백업 이유랄 것은 딱히 없었다. 술기운에 의한 치기일지도 모르지.그냥, 술에 젖어 반들하게 빛나 평소보다 혈색이 도는 입술의 맛이, 조금 궁금해졌을 뿐이었다.멱살을 잡고 끌어당긴 얼굴의 입술선을 혀로 느릿하게 핥다가 빨아들이면 눈앞에 있는 속눈썹이 간헐적으로 파드득 깜박이는 게 느껴졌다. 닿는 부분이 괜히 간질거린다. 아무리 이놈이라도 조금은 당황한 걸까. 그리 생각하니 조금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속에서 비집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잡고 있던 멱살을 던지듯 놓았다. "또 존나 독한 거 마시고 있구만. 혀가 얼얼하네." "―츄야야 말로 좀 작작 마시면 어때? 나 포도 맛 질렸는데." "질리긴 개뿔. 그거 몇도짜리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지긋이 자신을 쳐다보는 다자이를 무시..

츄다자/단편 2018.08.15

[츄다자/조각글] 독

*트위터 쪽 조각글 백업 “―――. ” 너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매번 날아갈 듯 가벼운데도 이상하게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부르는 너의 목소리는 독이다. 내 이름을 부르는 네 목소리는 항상 나에게 달큼한 무언가를 억지로 삼키케 하는 것 같아.부드럽게 녹아내려 와 그대로 서서히 숨을 막아버리는 독은, 나를 살살 꼬여내듯 불러. 무시하려 해도 결국엔 돌아보게 해.그렇게 너와 눈이 마추지면, 덫에 걸린 먹이처럼 시선을 피하지도 목구멍 너머로 삼키게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내 안으로 들어와 쌓이고 쌓여 이미 속은 망가질대로 망가졌는데도. 멀끔한 것은 번지르르한 껍데기 뿐이야.이런 나를 너는 몰라. 너는 나를 보면서 항상 위험하게 웃고만 있지. “―다자이.” 너는 내게 해로운 독이다,..

츄다자/단편 2018.08.15

[츄다자/조각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트위터쪽 조각글 백업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오늘의 다자이 오사무는 평소보다 한층 더 기분 나쁘다. ─놈에게 자연적으론 절대 날 리가 없는 여자 향수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한바탕 신나게 놀다 왔나 보군. 부드럽고 향긋한 그 냄새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고 이질적으로 붕 떠올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재채기하듯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놈은 의아하다는 듯 나와 눈을 맞춰온다. 고개 갸웃 거리지 마. 나한테 그런 짓 해도 하나도 안 귀여우니까. “어? 감기라도 걸렸어?” 걱정처럼 들리지만 느릿하게 즐겁다는 듯 말하는 이놈의 어투는 분명 걱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와아. 요새 감기가 독하다더니 츄야 같은 단순 바보한테도 감기에 걸리게 할 줄이야~!!” 역시나. 눈을 부릅뜨며 다자..

츄다자/단편 2018.08.15

[츄다자] Auberge de la saison : 秋

* 율라피(@wiya_Ra)님과의 사계 테마 트윈합작「계절의 여관」입니다.* 엘리스에 대한 해석은 지극히 개인적이니 혹여 원작과 다른점이 있더라도 감안해주세요! * 봄 https://rawi-pon.postype.com/post/1329543 (w.율라피)* 여름 http://right-dayo.tistory.com/14 (w.라덕)* 겨울 https://rawi-pon.postype.com/post/1329637 (w.율라피) 초대장을 하나 받았다.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우편함을 문득 열어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여러 전단지와 받을 때를 지난 우편물이 뒤엉킨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붉은색 봉투는 확실히 특별했다. 빛바랜 것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그것을 조심스럽게 빼내곤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츄다자/단편 2017.12.31

[츄다자] Auberge de la saison : 夏

* 율라피(@wiya_Ra)님과의 사계 테마 트윈합작 「계절의 여관」입니다.* 다자이 생일 때 썼던 조각글 중 하나에 살을 붙인 글. * 봄 https://rawi-pon.postype.com/post/1329543 (w.율라피)* 가을 http://right-dayo.tistory.com/15 (w.라덕)* 겨울 https://rawi-pon.postype.com/post/1329637 (w.율라피) 톡. 토독. 창문에 계속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에 잠의 바다에 잠겨있던 의식이 떠오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멍하니 창문을 바라봤다. 비가 오는 모양이다. 으으응-.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이 좋아 볼을 부비면서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면, 저절로 흐흥 하고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

츄다자/단편 2017.12.31

[츄다자] 손에 관하여

*14~5살쯤의 두 사람. 구토 소재 주의.(+이 글을 썼을 당시는 극장판이 나오기 전이라, 원작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카하라 츄야는 다자이 오사무의 손을 좋아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재수 없는 놈이라 생각했고 여전히 그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손등의 툭 튀어나온 뼈가 도드라져 보이는 마르고 가는 손. 이상하게 자꾸 눈길을 멈추게 되는 그 손은 여리 하다기 보다는 그냥 가늘다는 표현이 제일 들어 맞는다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에 빠지면서 턱을 쓸거나 머릿속을 정리할 때 무의식적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던 손가락을 가만 보고 있을 때가 참 많았다.그래서였을까. 함께 임무를 끝내고 돌아가는 어슴푸레한 새벽녘,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 같은 시간대엔 가끔씩 ..

츄다자/단편 2017.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