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다자/전력60분

[츄다자] 전력 60분 - 술

라덕 2018. 6. 10. 01:16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원하던 것이 눈앞에 딱 떨어지는 날. 그럴 때면 내색하지는 않지만, 괜히 가슴 한구석 어딘가가 만족감으로 찌르르 울리는 것이다.

그래, 지금처럼 말이지.

신발을 벗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오는 츄야를 아무 말 없이 가만 쳐다본다. 회색 티셔츠에 군데군데 찢어진 검은 스키니, 밑창이 약간 닳은 스니커. 매번 쓰는 모자는 여전히 빼놓지 않았지만, 평소와 다른 가벼운 차림에 저런 옷을 가지고 있었나 싶어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츄야가 여기까지 오다니 무슨 일이야?”


“아? 술을 마시고 싶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이유가 필요하냐?”


갑자기 눈앞에 내밀어 지는 비닐봉투를 무심코 건네받자마자 아래로 훅 떨어지는 무게에 으아 소리를 냈다. 뭐야, 난 츄야처럼 무식하게 힘이 세지 않단 말이야. 투덜거리며 봉투를 벌려 안을 본다. 위스키와 레몬과 탄산수와 얼음, 그리고 캔맥주 몇 개. 목적이 뚜렷한 구성이군. 아무리 생각해도 술집에 가는 쪽이 편할 것 같지만 내가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츄야가 만들어주는 하이볼은 이상하게 맛있었으니 잠자코 있기로 했다.


“뭐야? 얼음도 사 왔어? 센스 있잖아~.”


“뭐, 네놈 집에 얼음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무하네! 아무리 귀찮아도 얼음 정도는 얼려 놓는다구.”


요즘 날이 너무 더우니까 말이지. 술을 시원하게 마시고 싶은 계절이니 얼음은 꼬박꼬박 얼려두고 있었다.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안을 본다.


“안주는 없어?”


“없어.”


“엑, 내 통조림 달라고 해도 안 줄 거야.”


“달라고 할 생각도 없어.”


모자를 걸어두고 내 손에 있던 봉투를 다시 받아 익숙하게 부엌 쪽으로 가는 등을 흘끗 봤다. 도와줄 생각은 없지만, 맥주 정도는 입가심으로 미리 마셔두고 싶었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 테이블 옆에 털썩 앉았다.

해가 진지 오래인데도 낮의 기운을 잔뜩 받은 방안은 아직 훈기를 머금고 있었다. 제대로 된 여름이 오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더운 걸까. 찬술이 더 맛있어지게 된 것은 기쁘지만 습하고 더운 날씨는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아, 나에게 있어서 귀찮고 힘든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있구나. 열린 창문으로 조금씩 들어오는 선선하고 파란 밤공기가 반가웠다.

곧 츄야가 온더락 두잔을 만들어 자리에 돌아왔다. 받아든 유리잔을 손안에서 돌려본다. 카랑,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시원하다.

감사의 인사도, 건배사도 뭣도 없이 서로 묵묵히 잔을 입에 가져다 댄다. 풀벌레가 운다면 조금 풍류가 섞이겠지만, 아직 계절이 이르니까 아쉽다. 흐릿하게 보이는 밤하늘과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곧 담배 연기가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그러고 보니 츄야 얼굴을 본 것이 얼마 만이더라. 2주 전에 보고 안 봤었나? 츄야랑은 오랜만에 봐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니까. 앙숙인 주제에 아무 말도 섞지 않고 있어도 서로의 숨소리나 기색만으로도 안심된다. 물론 츄야에게 이 말을 해줄 생각은 절대 없지만. 


“...있잖아, 츄야.”


“어어.”


“왜 여기 와서 술을 마시는 거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물어보는 것은 어떻게든 확인받고 싶은 나의 심술이다. 나 스스로는 말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 말이 떨어지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잠깐동안의 침묵이었다고 생각한다. 고요한 방 안에서 잔의 얼음이 녹아 움직이는 소리와 담배가 타들어 가는 작은 소리만이 살아 움직였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내가 억지로 정한 대로, 츄야였다. 

몸을 내 쪽으로 기울여, 서로의 코와 코를 맞닿게 하고, 키스할 듯이 고개를 들이민다.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면 츄야의 눈동자 안쪽에서 무언가가 짧게 일렁이고는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아, 이번에도다. 이번에도 안 됐다. 다시 원래대로 몸을 되돌리는 츄야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방 한쪽 구석으로 떨어트렸다.


"......엄청 바보 같은 질문이잖아."


"후후, 그런가?"


내가 그냥 조용히 웃고만 있자 츄야가 테이블 위에 놔둔 내 잔에 일방적으로 건배하곤 술을 다시 입에 가져다 댄다.

뭐야, 내 잔은 이미 비었다구. 웃으면서 비난하듯 말하면 츄야는 아무 말도 않고 부엌 쪽으로 사라진다. 두고 간 담배 연기만이 츄야의 빈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츄야가 옆에 없는 사이에 몰래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술에 대한 갈증은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면 되지만, 닿을 듯 닿지 않는 것에 대한 갈증은 어찌 채우면 좋을지 모르겠어. 

역시 너 또한 선을 쉽게 넘지는 못하는구나, 얄궂게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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츄다자 전력 60분 / 주제 : 술